창녕성씨(昌寧成氏)의연원 1. 창녕성씨(昌寧成氏) 요약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 중엽에 중윤호장(中尹戶長)을 지낸 휘(諱) 인보(仁輔)이다. 창녕성씨는 시조로부터 6世에서 13派(判書公派, 獨谷公派, 檜谷公派, 桑谷公派, 郎將公派, 判事公派, 侍郞公派, 貞節公派, 舍人公派, 佐郞公派, 評理公派, 檢校公派, 知事公派,)로 분류되어 조선조(朝鮮朝)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친 명벌(名閥)의 하나이다 창녕성씨는 인구는 적어도 문묘배향(文廟配享) 1명(成渾), 묘정배향(廟庭配享) 1명(成希顔), 상신(相臣) 5명(成石璘, 成奉祖, 成 俊, 成希顔, 成世昌), 문형(文衡) 2명(成俔 成世昌), 대제학(大提學) 10명, 청백리(淸白吏) 5명(成 俔, 成世章, 成泳, 成夏宗, 成以性), 호당(湖堂) 5명(成三問, 成 侃, 成 俔, 成重俺, 成世昌),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 138명을 배출하였으며 무과급제자(武科及第者)는 정확한 통계를 알 수없으나 족보나 문헌지를 보면 상당수에 이른다. 또한 수많은 석학(碩學), 절신(節臣), 고관(高官)을 배출하였다. 특히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과 생육신(生六臣) 성담수(成聃壽)를 배출함으로서 절개(節槪)로 유명한 문중(門中)이 되었다.
2세(二世) 휘(諱) 송국(松國)은 고려 문하시중(高麗 門下侍中)이시다. 公이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겼었는데 시조(始祖) 중윤공(中尹公)이 타향(他鄕)인 송도(松都)에서 별세(別世)하시자 직접 시신(屍身)을 지고 천리(千里)나 되는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다가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니 해가 저물고 눈이 많이 내려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院)의 사랑에서 가숙(假宿)하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범이 시체 곁을 여러 번 맴돈 흔적(痕迹)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발자국을 따라 맥산(麥山)에 이르니 발자국도 멈추고 눈이 녹았는데 넓이가 산소(山所) 한자리쯤 되었다. 그 곳을 표시(表示)해 놓았다가 이곳에 안장(安葬)하니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孝誠)의 감응(感應)이다 하였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주향(主享)되셨다. 3세(三世) 휘(諱) 공필(公弼)은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휘(諱) 한필(漢弼)은 도첨의 문하찬성사(都僉議 門下贊成事)였다. 4세(四世) 혜암(惠巖)은 대선사(大禪師)였고, 군미(君美)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이며, 군부(君阜)는 중낭장(中郎將)이었다.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匡靖大夫 門下評理)였고, 군보(君補)는 문하평리(門下評理)였다. 5세(五世) 한충(漢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여완(汝完)은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였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준득(準得)은 총부상서(摠部尙書)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유득(有得)은 정승(政丞)이었으며, 윤득(允得)은 지신사(知申事)였다. 이(履)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이었으며, 저(貯)는 선부전서(選部典書)였다. 6세(六世) 기(紀)는 판서(判書)였고, 석린(石璘)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석용(石瑢)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석연(石珚)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며, 석번(石璠)은 낭장(郎將)이었다. 연(連)은 판서(判事)였고, 준(遵)은 중서시랑(中書侍郞)이었다. 사제(思齊)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태준(台俊)은 사인(舍人)이었고, 사준(士俊)은 좌랑(佐郞)이었다. 갑신(甲臣)은 평리(評理)였고, 을신(乙臣)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었으며, 언신(彦臣)은 지림주사(知林州事)였다 7세(七世) 달생(達生)은 벼슬이 숭록대부 판중추원사(崇祿大夫 判中樞院事)이고 시호(諡號)는 양혜(襄惠)이다. 개(槪)는 호(號)가 수헌(睡軒)이고 벼슬이병조참판(兵曹參判)이었다. 허(栩)는 예조참의(禮曹參議)였다. 사달(士達)은 호(號)가 이암(易庵)이며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참여되었고 벼슬은 대제학(大提學)이며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8세(八世) 승(勝)은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병자화(丙子禍)에 아들과 함께 죽었다 이름이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희(熺)는 호(號)가 인재(仁齋)인데 병자화(丙子禍)에 여러 번 엄한 국문을 받았으며 유배되었다가 돌아왔으나 충분(忠憤)을 못이겨 세상을 떠났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봉조(奉祖)는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며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다. 9세(九世) 삼문(三問)은 호(號)가 매죽당(梅竹堂)이며 벼슬은 승지(承旨)였는데 세조(世祖)가 선위(禪位)를 받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화(禍)를 당했다. 사실(事實)이 육신전(六臣傳)에 나타나 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담수(聃壽)는 호(號)가 문두(文斗)이며 진사였다 침낭(寢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고 병자화(丙子禍)에 김시습(金時習) 등 5명(五名)과 함께 충절(忠節)을 지켜 행동은 달라도 마음이 같으니 세상에서 생육신(生六臣)이라 칭한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숙(靖肅)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임(任)은 호(號)가 안재(安齋)이고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간(侃)은 호(號)가 진일재(眞逸齋)이고 집현전 박사였고 호당(湖堂)에 올랐다. 현(俔)은 호(號)가 허백당(虛白堂)이며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였고 문형(文衡)을 받았다 시호(諡號)는 문대(文戴)이다. 준(俊)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이고 시호(諡號)는 명숙(明肅)이다. 건(健)은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는 문헤(文惠)이다. 중엄(重淹)는 호(號)가 청호(晴湖)이고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였으며 호당(湖堂)에 올랐다. 10세(十世) 세창(世昌)은 호(號)가 둔재(遯齋)인데 문형(文衡)을 받았고 벼슬은 좌의정(左議政)이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몽정(夢井)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인데 하산군(夏山君)에 봉(封)해졌다. 11세(十一世) 제원(悌元)은 호(號)가 동주(東洲)인데 벼슬은 현감(縣監)이었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운(運)은 호(號)가 대곡(大谷)인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벼슬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이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수침(守琛)은 호(號)가 청송(聽松)이고 벼슬은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수종(守琮)은 시호(諡號)가 절효(節孝)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희안(希顔)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아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고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며 묘정배향(廟庭配享)되었다, 12세(十二世) 윤해(允諧)는 호(號)가 판곡(板谷)인데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혼(渾)은 호(號)가 우계(牛溪)인데 벼슬은 좌참찬(左參贊)이며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수경(守慶)은 벼슬이 판관(判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진양성(晋陽城)이 함락되자 김시민(金時敏)등과 함께 순절(殉節)하였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물게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세장(世章)은 호(號)가 사암(思菴)이고 벼슬이 호조판서(戶曹判書)였는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3세(十三世) 문준(文濬)은 호(號)가 창랑(滄浪)인데 벼슬은 현감(縣監)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남(灠)은 호(號)가 청죽(聽竹)이고 벼슬이 현감(縣監)이었는데 별세할 때에는 유훈(遺訓)을 남겼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언충(彦忠)은 호(號)가 가정(稼亭)이고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않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영(泳)은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4세(十四世) 하종(夏宗)은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세(十五世) 여신(汝信)은 호(號)가 부사(浮査)인데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의(安義)는 호(號)가 부용당(芙蓉堂)인데 벼슬은 승지(承旨)였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6세(十六世) 이성(以性)은 호(號)가 계서(溪西)이고 벼슬이 부사(府使)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환(瑍)은 호(號)가 유촌(柳村)이고 벼슬이 공조참의(工曹參議)였는데 창녕성씨기축대보(昌寧成氏己丑大譜) 편찬(編纂) 물계서원(勿溪書院) 창건(創建) 성시중효행록(成侍中孝行錄) 편찬(編纂)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22세(二十二世) 기운(岐運)은 자(字)가 봉서(鳳瑞)이고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을 지냈다.
2. 昌寧成氏의 연원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중윤호장(中尹戶長:태봉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한 문무의 관호)을 지낸 인보(仁輔)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신라 대관 저(新羅 大官 貯)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약사(姓氏略史)”에는 시조 인보(始祖 仁輔)가 고려 고종(高麗 高宗)때 성씨(成氏)의 성(姓)을 창성(創姓)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 기타 문헌사료(族譜 其他 文獻史料)도 시조(始祖)는 인보(仁輔)로서 상계(上系)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성씨(成氏)의 유래(由來)이다.
창녕성씨 족보 계축보(昌寧成氏 族譜 癸丑譜)는 성종(成宗) 24년 계축(서기 1493년)에 처음 편찬되어 성씨족보(成氏族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계축보(癸丑譜)라 부른다.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에 시조(始祖)의 유래(由來)와 성씨(成氏)의 세계(世系)를 소상히 적어서 전하여 오고 있으니 이것이 정설(定說)이다. 계축보(癸丑譜)의 서문(序文) 종족에 족보가 있는 것은 예전부터였다. 족보로서 이름을 기록하니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또 그 멀고 가깝고 친함과 성김의 차별과 근본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를 알 수 없다. 나무에 비유하면 맨 처음에는 한 뿌리일 뿐이다. 뿌리가 세워진 다음에 능히 자랄 수 있어서 수많은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그늘을 이루고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맨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같은 자가 형제가 되고 할아버지가 같은 자가 당종이 되고 증조가 같은 자가 재종이 되고 고조가 같은 자는 다만 친족이라고 일컬을 뿐이며 여기에서 차츰 멀어지면 복이 없어 노인(일반사람)을 보듯 한다. 그러나 맨 처음을 살펴보면 모두 하나에서 나왔으니 이는 마치 나무가 지엽은 만 가지지만 근본은 하나인 것과 같다. 우리 성씨는 본래 대족이다. 총랑공 이후로부터 고관대작이 연달아 일어난 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당숙 자정(계축보를 만든 重性의 字)씨는 군자인 분이다. 종족에 족보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구한지 이십여년 만에 시조인 중윤공(中尹公) 이하를 찾아내어 총랑공(摠郞公)에 연결하여 정종(正宗)을 삼은다음 그 지손 서손 외손 등 모든 종족(宗族)들이 이들로써 아버지를 계승하고 할아버지를 계승하였으며 미약한 방친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자세히 기록하시기를 극진히 한 다음에 그만 두었으니 선조를 잊지 않은 효심이 애연히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만일 지극한 마음을 쓰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겠는가. 우리 종족들로서 이 족보를 보는 자마다 모두 자기 몸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가정을 보전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하여 아름다운 풍습을 이루게 된다면 도움 됨이 어찌 적겠는가. 나는 본원을 찾은 것을 기뻐하고 또 당숙의 뜻을 가상히 여겨 나 역시 전해들은 것으로서 한 두 가지를 정리하여 들려주는 바이다. 癸丑(1493年 成宗 24年) 新正 二日에 嘉善大夫 行僉知中樞府使 兼 同知春秋館事 成俔 磐叔(成俔의 字)은 삼가 序하다 註 成俔(九世) : 桑谷公의 長孫인 念祖의 三子, 1439(世宗 21)年生, 1504(燕山 10)年卒, 享年 66, 號는 慵齋 虛白堂 官至漢城府判尹 工曹判書 兼 大提學, 文衡에 오르고 淸白吏에도 錄選 되었다. 諡號는 文戴 계축보발문(癸丑譜 跋文:책의 끝에 적는 글) 내가 일찍이 당형인 정승 봉조에게 가서 우리 족파의 근본을 물었더니 정승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휘 송국과 휘 공필 두 선조만은 전해서 들었을 뿐이고 그 이상은 알 수가 없다. 나의 동생 참판 순조는 나보다 조금 자세히 알고 있으니 가서 물어 보아라 하였다. 나는 즉시 가서 정승의 말씀을 여쭈었더니 참판은 대답하시기를 두 선조 이상은 나 역시 알지 못하니 이는 족보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 두 분은 우리 가문의 존장이신데도 오히려 시조의 근본을 모르고 계시니 다시 어느 곳에 보고 들어서 아는 자가 있겠는가. 하고는 이때부터 마음을 크게 먹고 있을만한 곳을 찾은지 이십여 년이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판서 성기의 서손인 사직 성원을 만나 물어서 시조인 중윤공이 실려 있는 족보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름에 끄슬리고 좀이 먹어서 글자가 반절은 없어졌는데 이것을 족보의 맨 앞에 기록하였으며 또 후손들을 찾아 위와 같이 기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문의 본손 지손이 이처럼 번성한 것을 알게 하였다. 後孫 通訓大夫 行昌平縣令 成重性 子正은 恭敬히 跋文을 쓴다 註 成重性(八世) : 三谷公의 三子인 僉樞公의 二子, 號 翠筠軒 官至昌平縣令 時 1493年 成宗 24年 癸丑에 昌寧成氏 族譜를 처음 編纂함, 至 判官 ※ 선세고적(先世古蹟)으로 국조문헌비고(國祖文獻備考)와 승인무학전(僧人無學傳)의 문헌자료(文獻資料)를 보면 성씨(成氏)는 주문왕(周文王)의 일곱째 아들인 성(郕)나라 숙무(叔武)의 후손이다. 자손(子孫)들로 인하여 나라를 씨(氏)로 삼았는데 뒤에 초(楚)나라에게 멸망되자 읍(邑)을 떼고 성씨(成氏)가 되었다. 시조 인보(始祖 仁輔)의 아버지는 숙정(叔正)으로 신라(新羅) 때 대관(大官)을 지낸 성저(成貯)의 후손이다(국조문헌비고에서발췌:國祖文獻備考 拔取)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學事 成鏡)이 있었는데 상곡(上谷)사람으로서 동쪽 조선(朝鮮)으로 건너왔다. 그 후 백제(百濟) 때에는 성충(成忠)이 있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성저(成貯)가 있었는데 모두 절의(節義) 와 관벌(官閥)로 한 시대에 들어났다. 고려(高麗) 때에는 숙창(淑昌)이란 분이 계셨는데 벼슬은 호장부정(戶長副正)이었다. 호장부정(戶長副正)이란 바로 옛날의 원외랑(員外郞)인데 이분이 휘 인보(諱 仁輔)를 낳으시니 벼슬은 중윤호장(中尹戶長)이었다. (승인무학전에서 발취:僧人無學傳 拔取). 위와 같은 기록들이 있으나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이며 고려중엽(高麗中葉) 이후에 일어났는데 중윤공 휘 인보(中尹公 諱 仁輔)가 시조(始祖)로 상계(上系)는 상고(詳考)할 길이 없고 고증(考證)할 사료(史料)가 없어 계축보 창제(癸丑譜 創制)할 때 중윤공 휘 인보(中尹公 諱 仁輔)를 시조(始祖)로 하였다
3. 창녕성씨 인구(昌寧成氏 人口) 1985년 인구조사 때에는 38,872 가구, 인구 158,335명이었고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52,058 가구, 인구 167,903명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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