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몽룡과 창녕성씨
제목: 칼럼 2005.11.16.수
이몽룡과 창녕성씨
춘향전의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며 창녕성씨 후손이다.
그는 청백리로 통한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청렴한 관리에게 내리는 녹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청백리로 선정된 사람은 215명에 불과하다.
경상북도 봉화에는 성이성의 종택이 남아있다. 성이성이 벼슬을 그만둔 뒤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던 작은 집터에 후손이 다시 크게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성이성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남원에도 춘향묘를 비롯해 시내 곳곳에 춘향전과 관련한 기념물들이 있다.
특히 광한루에는 옛날 비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곳이 있다. 남원지역에서 부사를 지낸 이들의 사적비다. 여기에 부사 성안의(成安義)의 비석이 있다. 남원부사 성안의는 바로 성이성의 아버지다.
성안의가 남원지역의 부사를 지낸 것은 선조 40년(1606)부터 광해 3년(1610)까지 5년 동안이다.
그 4년 동안 그의 아들 성이성도 아버지와 함께 남원에서 살았다. 성이성은 13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와 함께 이곳 남원에 머물다가 떠난 것이다.
성이성은 22세 되던 해에 과거의 예비시험인 생원시에 합격한다. 그리고 33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과거에 합격한 후 사헌부, 홍문관 등 주로 삼사의요직을 거친다.
그러나 강직하고 직언을 잘해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했다. 낙향을 했다가 임금이 부르면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벼슬을 하기도 했다.
성이성은 곧은 성품 때문에 네 차례나 암행어사를 한다. 그의 암행어사 파견 기록은 <인조실록>과 그가 쓴 <암행일지>에도 나타난다.
인조 때 그는 암행 채비를 갖추고 호남으로 향한다. 여산, 정읍, 고창 등을 거쳐 하루에 백리 정도씩을 가면서 고을 수령의 행정을 탐문했다.
그러나 성이성의 호남 암행일지에는 남원에서 출두했다는 기록이 없다. 성이성은 암행을 다니다가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이후에는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두 번째로 남원에 들렀다고 적고 있다.
성이성의 행적과 관련된 또 다른 내용은 창녕성씨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 <교와문고>라는 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춘향전에 없는 내용까지 실려있다. 성이성이 바로 이몽룡의 모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춘향전에 당연히 성몽룡이어야 하는데 왜 이몽룡이 됐을까.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니라 춘향에게 붙여주었다. 성몽룡이 아니라 성춘향이라는 것이다.
춘향은 어떤 인물이인가. 실제 남원 지역에는 춘향이라는 이름을 소재로 한 설화들이 많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없다. 결국 춘향이 자결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 후 큰 재앙이 있었으며 이를 두고 남원 사람들은 춘향의 한(恨) 때문이라고 한다.
천민의 신분이었던 만큼 춘향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춘향전에만 전해 올 뿐이다. 남원에는 전통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춘향 이야기가 전해온다. 춘향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했다는 이야기가 분명한 근원이 되는 셈이다.
창녕성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왔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성이성을 모델로 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창녕성씨 문중에서는 기생과의 사랑 놀음에 양반 자제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 사실이다.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성이성은 암행어사를 끝낸 직후 남원을 찾는다. 그 때 나이 53세였다. 그는 왜 광한루를 찾았으며 누구를 만났을까. 성이성은 이곳에서 늙은 기생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얘기를 나눈다. 그 기생은 과거에 자신이 춘향과 사랑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과거의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특히 자기가 떠난 다음의 일이 궁금했을 것이다.
성이성은 그때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사소년사 야심불능매(思 少年事 夜深不能寐, 소년 시절의 일을 생각하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